봄이 오는 힘찬 모습을 죽순(竹筍)이상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대지를 뚫고 불끈 솟아오르는 죽순은 창조의 위력 그 자체다. 땅 위로 고개를 내밀기 무섭게 순식간에 평생 지켜갈 높이로 치솟는 역동성은 진정 세상을 바꾸는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원초적 믿음을 키워주기에 흡족하다.
병술년 새 봄이 어김없이 용트림하는 담양(潭陽)의 대숲은 싱그럽다. 따뜻한 바람이 남녘으로부터 불어온다 해도 그 푸르름을 정갈하게 손질할 뿐, 한 치의 교만이 없는 대나무들은 삭풍을 달래서 보리밭 사래에 부드러운 숨결을 일궈낸다. 어느 화백은 “대나무에는 향기가 없다고들 하지만 때로는 그 향을 바람에 실려 보내느니라”고 읊었거니와 보리밭 이랑위로 세월을 이겨낸 죽향(竹香)이 그윽이 흐르는 병술의 봄이다.
나는 뒤안에 대나무들이 줄지어선 시골 농가에서 대의 소리와 몸짓, 호흡을 더불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그만 마을을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고 있는 죽림이 의당 농촌 부락엔 흔히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크고 작은 개체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느 무더기도 쉽게 떼어 낼 수 없을 듯 세력을 과시하며, 험한 세월을 뿌리 밑 땅 속 깊이 묻고 서 있는 대숲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바탕에 깐 교사(敎師)로서 내 인생의 지표가 되고 있다.
대(竹)는 사철 푸르다.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상관 않고 한 결로 푸르다. 비가 온다고 쉽게 젖거나, 바람이 분다고 쉽게 마르지 않는다. ‘송죽(松竹)을 변하지 않는 지조의 고고한 표상으로 추앙해 온 우리 문화가 퇴색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나는 어린 시절 서당(書堂)에 다닐 적부터 가슴에 간직해 왔다. 대나무는 졸갑스런 변색을 외면한다. 베어져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푸르름을 잃는 법이 없다.
대나무는 속을 깨끗이 비우고 곧게 산다. 몸체가 크면 속을 그만큼 크게 비운다. 붓대에 쓰이는 작은 것에서부터 필통이나 밥통으로 이용되는 왕대에 이르기까지 그 그릇에 맞춰 속이 비어 있다. 기품이란 스스로를 비울 때 견지된다는 것을 지혜 있는 사람은 배운다. 마음을 비우겠다고 때마다 떠들어대면서 탐욕과 포만으로 쇠망해가는 인생들로 피곤한 세상임에도 속을 비운 청죽(靑竹)은 여전히 ‘대쪽같은 삶’을 보여준다.
대는 안 보이는 땅속에 강한 뿌리를 갖추고 있다. 척박한 곳에서조차 뿌리를 튼튼히 박아서 거센 바람에도 뽑히지 않는다. 푸석한 땅도 대뿌리가 내리면 끈끈한 점토처럼 강도가 높은 땅으로 변한다. 이처럼 강인한 뿌리의 힘이 있기에 드세게 바람이 불어 닥쳐도 푸른 대나무는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폭풍이나 태풍에 아무리 흔들리고 시달려도 종국에는 제 자리를 거뜬히 되찾고 바로 선다. 불쑥불쑥 뿌리 채 뽑혀서 수시로 옮겨 다니는 무리가 많이 눈에 띄는 요즈음 세상에 대숲이 그저 대밭(竹田)일 수만은 없다.
대는 그 쓰임새도 폭 넓은 이타성(利他性)을 갖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의·식·주에 고루 쓰인다. 생활용구와 웰빙제품이 되어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돕는다. 죽순으로부터 시작하여 대잎차, 죽초액(竹酢液), 대숲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용도를 제공한다. 야생차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치는 죽로차(竹露茶)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맑은 이슬과 대잎 사이로 스며드는 엷은 햇볕을 받아먹고 자란 차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다. 죽엽주 또한 대의 청정성과 약리작용을 술로 빚어낸 것이라 하겠다.
최근에는 대나무 조경이 도시의 환경을 차원 높게 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대나무를 조경수로 쓰게 된 것이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도시 건축에 많이 도입하는 밑바탕에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을 가까이 두고 허물어져가는 정신문화의 빈 곳을 메워보려는 심리가 깔려 있는 듯하다.
친환경적 생활(LOHAS)과 웰빙, 자연과 인간의 상생, 세계화와 자주성의 조화가 강조되는 시류에서 맞는 봄이기에 그럴까, 대숲을 보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담양의 죽녹원(竹綠園)과 소쇄원(瀟灑園)을 찾아 감격스런 봄을 만들어 봐야겠다. 그곳에서 대(竹)와 호흡을 나누며 우리사회 도처에서 바람 앞의 촛불마냥 흔들리는 대의(大義)를 다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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