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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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7> 남녀상열지사 나라, 남녀유별 나라의 차이
여의사와 간호사의 탄생 기원은? 한국에서 여의사와 간호사는 유교가 만들어 낸 제도다. 남녀상열지사 사회와 남녀유별 사회의 간극을 좁히는 제도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은 고려를 남녀상열지사의 나라로 규정했다. 남녀의 행동이 문란한 낯 뜨거운 사회라는 비판이다.
조선왕조가 출범한 1392년 대사헌 남재는 풍속을 바로잡는 방안으로 양반 부녀들의 만남 범위를 부모와 형제자매, 숙부, 외숙, 이모 등으로 제한을 주장했다. 여성이 남성을 만날 범위를 극소화 해 성의 타락을 막자는 건의였다.
나라에서는 여성의 지조를 교육하는 삼강행실도 등으로 성 풍속 다시 세우기 홍보에 나섰다. 고려시대 이성의 만남 장소인 사찰 행사를 억압하고, 부녀들의 절 출입도 막았다. 남녀의 눈이 맞을 기회, 여성의 실절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서서히 나라 풍속은 남녀유별로 자리잡혀갔다. 의식주 등 인간사 모든 분야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내외법(內外法)이 지켜져 갔다. 의술도 거대한 흐름에서 비껴갈 수 없었다. 부녀들이 남자 의사인 의원의 진료를 거부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오가도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함 입증 차원에서 남자 의원의 손길을 외면했다. 외간남자에게 속살을 보이는 것은 정조를 잃은 것과 같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결과다.
나라에서는 특단의 해결책이 필요했다. 태종 6년인 1406년에 지제생원사인 허도가 의료사각지대인 부녀들의 현주소를 보고 했다. “질병이 있는 부녀들이 남자의원에게 진맥 받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이로 인해 사망도 속출합니다.” 그는 또 “창고나 궁궐 내 관아의 어린 여자아이 수십 명에게 의료 교육을 시켜 사대부의 부녀들을 치료하게 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상언했다. 이를 태종이 윤허함으로써 전문직 여의사와 여간호사인 의녀제도(醫女制度)가 시작됐다.
허도는 세종 때는 교육의 효율성을 위해 10~15세의 총명한 관아의 여종을 뽑는 것을 제도화 했다. 세종은 유교입국, 남녀유별을 더욱 강화하는 방편으로 의녀 양성을 적극 지원했다.
의녀는 전문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천자문, 효경, 정속편 등 한문과 한글의 문자 교육을 받았다. 교과목으로 산서, 직지맥, 찬도맥, 가감사십방, 화제방, 부인문 등 진맥법, 조제법, 침구법을 두루 배웠다. 매월 공부해애 할 분량이 정해지고, 시험이 실시됐다. 심화교육을 받은 의녀들은 왕실의 여성을 치료하는 내의원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담당하는 외의원으로 배치돼 각각 근무했다.
전문직 여의사와 여간호사인 의녀의 역할은 크게 다섯 가지다. 먼저, 의료 행위다. 궁중연인과 사대부 여인을 진맥하고, 침을 놓는다. 다만 처방은 하지 않았다. 다음, 조사원 역할이다. 산모의 출산을 돕는 것이다. 또 국왕의 수발을 드는 일도 맡았다. 또한 형사의 역할도 했다. 여성 피의자를 수색했다. 특히 사약을 받는 여성에게 약을 전달하는 임무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우미 역할이다. 신분이 관아의 종이었기에 각종 연회에 불려갔다. 당초 의녀는 전문직으로 출발했지만 성종 이후 기녀와 함께 연회에 불려나갔다. 의녀와 기녀는 함께 초청된 것은 아니지만 위상 약화는 불가피했다. 연산군은 잔치 때 젊은 의녀들을 기녀들과 함께 참석케 했다. 이 무렵부터 의녀는 약방기생으로도 불렸다.
당시 부호들은 사치가 심했다. 이에 연산군 8년인 1502년 6월, 혼가에 의녀를 보내어 과다 혼수품을 적발하게 했다. 의녀는 그 뒤 연회에서 기녀와 함께 어전 섬돌 위에 앉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의서와 함께 음악을 배워 연회에 참가하게 된다. 반정을 한 중종은 의녀들이 연회에 참여를 법으로 금지시켰으나 이미 무너진 기강은 되돌려지지 않았다.
약방의녀의 천시된 이미지는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 의사 알렌은 5명의 어린 기녀를 제자로 받았다. 총명한 어린 소녀들에게 의학을 공부시켜 여의사 겸 간호사로 키우려 요량이었다. 그런데 소녀들은 학생의 지위에 앞서 기녀 출신으로 신분 제약이 있었다. 여러 연회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일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소녀들이 5개월 공부했을 때 정부의 고관인 김윤식과 제중원 주사가 여학생들을 기녀로 취급해 희롱했다. 고종황제는 크게 화를 내고 제중원 주사를 교체했다. 그렇다고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해 12월에 청나라에 온 위안스카이의 공관에 남은 학생 3명이 팔려갔다. 알렌과 소녀의 부모들은 백방으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알렌이 여의사와 여간호사 선발을 계획했던 것은 상류층 여성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의료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인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여주는 진찰을 거부한 여인들이 많았다. 진료를 해도 발을 치고 진맥하는 처지였다. 훗날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도 발을 친 방에서 진맥했다, 특히 진맥할 부위 외에는 몸을 모두 천으로 가렸다. 명성황후도 마찬가지였다. 발 밖에서 천으로 감싼 왕비의 신체 일부만 보고 진단해야 했다.
일반 양반가의 여인 진료도 녹록하지 않았다. 남자 의사와 여자 환자의 피부접촉을 피하는 방법이 고안됐다. 여성의 손목 위에 명주천을 덮은 뒤 맥을 짚었다. 그러나 진료의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중원의 교육생 소녀 5명의 정착 실패는 왕실과 사대부 여인들의 치료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나라에서는 미국인 여의사를 초빙해 왕실과 고관의 여인들 치료를 맡겨야 했다. 조선의 의녀는 최고 전문직 여성이다. 나라에서 인정을 하고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남자나 여자나 의료인이 최고의 선망 직업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의사의 여성 비율은 20%에 근접했고, 간호사는 아예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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