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기와 관리의 500년 사랑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9-25 21: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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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80> 관기와 관리의 500년 사랑
 
기생은 문화인이다. 춤과 노래를 비롯하여 시, 그림, 글씨에 재능을 가진 교양인이다. 행사장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전문 직업인이다. 법적 신분은 양인이다. 단 관의 하인으로 기생이 된 관기(官妓)는 천민이다. 경제적 생활도 중인 정도에 해당했다. 그러나 사회적 대우는 천인이었다. 인격적 대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시대 남성의 이중성의 민낯이 기생 제도다. 양반 등 지배층의 성 해방구 역할을 한 게 기생집이다.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의 국경지방 관기들과 관비들은 인격이 거의 무시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국경 근무자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했다. 위험한 지역에서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면 업무에 소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관도, 무관도, 하급 군인도 가족과 떨어져 ‘군대 생활’을 해야 했다. 나라에서는 젊은 남성의 생리현상을 해소시킬 방안으로 관기를 활용했다. 관기를 근무 군인의 현지처로 생활하게 했다. 관기가 부족하면 관비로 채우기도 했다.

남녀 관계는 미묘하다. 원치 않는 만남에서 불이 붙기도 한다. 조선시대 지고지순의 사랑이 홍랑과 최경창의 러브스토리다. 홍랑은 함경도 흥원 출신의 관기이고, 최경창은 함경도 경성을 방어하기 위해 온 관리다. 둘이 산 시대는 조선 선조 때다. 둘의 첫 만남은 업무적 관계였다. 관기인 홍랑은 좋고 나쁨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관리를 섬겨야 하는 운명이었다.

34세의 최경창이 함경도 북평사로 경성에 부임했다. 29세인 선조 1년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글씨와 그림, 활에 뛰어났다. 특히 시는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숙종 때 그의 문집이 간행되자 당대의 학자인 송시열이 서(序)를 쓰고, 대제학인 이민서와 중견학자·남구만이 발문(跋文)을 쓸 정도로 비중이 높았던 인물이다. 또 남학명은 최경창과 홍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록했다. 남학명은 남구만의 아들이고, 이민서의 사위다.

홍랑은 경성 최고의 기생이었다. 미모와 가무가 뛰어났다. 또 시를 잘 읊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홍랑과 문학 경지가 높고 호탕한 성격인 최경창은 서로를 금세 알아보았다. 예술 코드로 깊은 연인이 되었다.

홍랑의 나이는 이팔청춘인 16세를 갓 벗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관기는 30세가 넘으면 현역에서 물러난다. 은퇴한 퇴기가 된다. 기생은 16세를 전후해 본격 활동한다. 전성기는 18~20세쯤으로 짧다. 나이다 들수록 인기가 떨어진다. 항간에서는 ‘기생 나이 스물 살이면 환 갑’이라는 표현도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홍랑이 최경창을 만날 때는 20세 이하로 볼 수 있다.

총명하고 꽃다운 소녀를 본 최경창은 군막에서 동거를 했다. 꿈같은 시간이 6개월 흘렀다. 최경창의 임기가 끝났다. 그는 한양 도성으로 향했다. 홍랑은 님을 배웅했다. 경성을 출발해 함흥 인근의 함관령까지 따라왔다. 이 고개에서 둘은 이별해야 했다. 마침 밤은 깊어지고 비까지 내렸다. 서러운 헤어짐을 맞은 홍랑은 버드나무를 꺾은 뒤 시 한 수를 읊었다.

산 버들가지 꺾어 님에게 드리옵나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 내릴 때 새잎이라도 돋는다며
소녀를 본 듯이 반겨 주옵소서.

홍랑의 애잔한 시는 500년 후 국문학자에 의해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 박사가 특별한 발문을 쓴다. “사진으로 찍어 놓은 그 시를 3년 전에 내 눈으로 보니깐, 홍랑이 그 당시의 한글 맞춤법으로 쓴 글씨가 여성스럽고 매우 우아했다.” 이병기 박사는 최경창의 답서에도 대단한 호평을 했다. “최경창의 한시의 한자는 당대의 문장가요 시인답게 참으로 명필이었다."

연인의 글을 받은 최경창은 한시 답서를 썼다.

상간맥맥증유란(相看脈脈贈幽蘭)
차거천애기일지(此去天涯幾日還)
막창함관구시곡(莫唱咸關舊時曲)
지금운우암청산(至今雲雨暗靑山)

애달픔으로 마주 보며 가슴 속 영혼의 난초를 드리오
지금 하늘 끝으로 떠나시면 그 언제나 돌아오시려오
부디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시오
그 노래 듣는 지금도 눈물이 흘러 푸른 산도 흐릴 뿐이오.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한 두 사람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한양에 돌아온 최경창은 다음 해에 병석에 눕는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7일 밤낮을 달려가 그리운 님과 재회했다. 그러나 사랑의 몸부림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최경창은 국상 중에 여성을 만난 죄로 파직됐다. 당 시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가 승하해 관리들이 여성과의 자리를 피하는 시기였다. 또 함경도 등의 국경지방 사람은 도성 출입도 금지돼 있었다. 최경창은 두 가지 죄목에 얽혔다.

홍랑은 울며 경성으로 돌아갔다. 최경창은 8년 후 복권, 연인이 있는 경성의 부사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영화 같은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함경도 땅에 발을 디딘 그가 급사를 한다. 경기도 파주에 묻힌 최경창의 묘에는 움막이 지어졌다. 젊은 여성이 얼굴을 인두로 지지고 꼬박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홍랑은 오로지 최경창이 쓴 원고만을 가슴에 품고 피란을 했다. 이 덕분에 최경창의 글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보존되고 있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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