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가 무너진 서동의 정력제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1-28 15: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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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24>선화공주가 무너진 서동의 정력제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밀어 두고(밀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서 유행한 동요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밤마다 사내를 몰래 안고 잔다는 내용이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진 소문은 대궐까지 알려졌다. 부정한 공주로 찍힌 선화는 먼 시골로 유배를 가게 됐고,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행선지를 백제로 바꾼다. 한국 고대사의 로맨스인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 이야기다. 아이들의 입을 빌려 선화공주를 낚은 서동은 백제 제30대 무왕이다.


그는 법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는 마룡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다. 몰락한 왕손인 무왕은 어린 시절 맛동(서동薯童)이로 불렸다. 마룡지에서 2km쯤 떨어진 용화산에서 마를 캐 생활했기 때문이다.

 

맛동이는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이다.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서라벌에 갔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었다. 그의 주변엔 아이들이 모였다. 그는 노래를 알려줬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맛둥 도련님을(薯童房乙)/밤에 몰래 안고 간다(夜矣卯乙抱遺去如)’
향토사학자들은 서동이 선화공주와 알야산성(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 근처)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알야산성은 용화산에서 5~6km 지점이다. 알야산성은 백제의 산간지역에서 평야부로 진입하는 길목이다. 당시의 국경은 수십킬로미터 씩 떨어진 성과 성의 개념이었다. 주요 거점 성을 중심으로 방어적 개념의 국경선이 자리 잡았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은 알야산성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수십킬로미터 밖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산간지역은 일종의 통치력의 완충지대와 비슷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알야산성은 공격의 전초기지이고, 방어의 핵심기지가 되는 지정학적 위치다.
만약에 신라군이 소백산맥을 넘어 알야산성을 점령한다면 남쪽으로 금마와 김제로 나가 호남평야를 손에 넣을 수 있고, 북으로 진격하면 황산벌을 거쳐 사비(부여)로 직행할 수 있다. 그만큼 백제로서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그렇기에 훗날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도 태자 시절에 몇 개월씩 묵으며 군사들을 지휘했다.
알야산성에서 결혼한 무왕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왕궁을 신축하고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즐긴다. 무왕의 익산 천도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10세기에 제작된 일본의 관세음험기(世音應驗記)에는 ‘정관(貞觀) 13년(서기 639년) 제석사가 뇌우(雷雨)로 불탔다. 같은 해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遷都)했다’고 소개돼 있다. 무광왕은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금마 왕궁지역이다. 또 왕궁리 유적에서는 백제 기와 등 모두 3000여 점의 유물, 왕만이 사용하고 왕궁에서만 사용되는 유물이 다량 발굴됐다.
국경 도시에서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민 무왕과 선화공주. 그들은 전쟁과 평화가 상존하는 현장에서 결혼생활을 하다가 익산시 석왕동의 쌍릉에 묻힌다.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인 맛동이. 훗날 무왕이 되는 맛동이는 아이들의 노래로 선화공주를 얻었을까. 아닐 것이다. 선화공주가 적국인 백제까지 따라왔다면 서동에겐 절대적인 강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봤다.
무왕은 마를 캐 팔던 맛동(서동)이다. 마는 정력식품이다. 평소 마를 장복한 무왕은 절륜의 정력가가 아니었을까. 한약 명으로는 산약(山藥) 혹은 서여(薯여)라고 불리는 마는 예로부터 남성들의 성 능력 개선을 위해 사용됐다. 동의보감은 `허약하고 과로한 몸을 보강하고 기력을 더하게 한다'고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생마를 갈아서 마시고, 꿀을 섞어 쌀과 함께 죽을 쒀 먹기도 했다. 꿀을 섞으면 정력이 더욱 증진되기 때문이다. 또 양기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술을 만들어 복용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도 체력 보강을 위해 평생 섭취한 식품이다.
마를 장복한 청년 서동은 정력이 넘치고 넘쳤으리라. 또 서동이 살던 인근의 완주군 봉동읍은 생강의 주산지다. 생강 밭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생강은 아라비안나이트에 정력제로 소개된 열량 높은 식물이다. 위를 따뜻하게 해서 소화를 돕고 몸을 덥히는 효능이 있다. 청년 서동은 자연스럽게 마와 함께 생강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탄탄한 몸에 지혜로운 서동은 엄친아였을 것이다. 마는 지혜를 키운다고 동의보감에 기록돼 있다.
어찌 선화가 빠지지 않겠는가.
'정력남' 백제 무왕은 선화공주와 결혼한 뒤에도 신라와 무려 13차례에 걸쳐 전쟁을 했다. 대부분 백제가 선공을 해 잃었던 땅을 되찾았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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