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피임법과 환정술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3-28 09: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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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39> 왕건의 피임법과 환정술

 

피임법 중의 하나가 질외 사정이다. 남자가 흥분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페니스를 질 외에 빼는 피임법으로 성교중절이라고도 한다. 고대로부터 행해진 이 피임법은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다. 남성의 심리적, 육체적 통제가 쉽지 않은 탓이다.


질외사정의 최초 기록은 구약성서다. 창세기 38장 8절에서 오난은 성 행위 때 정액을 질 밖으로 분출했다. 오난의 형은 결혼 후에 죽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죽은 형의 아내와 관계를 가지라고 했다. 2세를 생산하라는 명령이었다. 오난은 형수와 잠자리를 한다. 그러나 자식을 갖지 않으려고 사정 직전에 성기를 질에서 제거해 바닥에 사정했다. 그는 이 행위로 신에 의해 벌을 받고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인물과 연관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사에 나오는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질외사정 스토리다. 왕건은 삼한을 통일한 인물이고, 장화왕후는 새나라 건국의 숨은 공로자다. 왕과 왕후 사이에 난 왕자가 고려의 제2대 군주인 혜종이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이다. 후고구려 궁예의 부하 시절이다. 통일신라는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되고, 견훤의 후백제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부지방에는 궁예가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다.


당시 물산이 풍부한 나주는 명목상 통일신라 권역으로, 후백제 입김이 작용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지방호족들의 자치영역이었다. 나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후백제는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이 풍부한 나주를 확실히 지배하면 후삼국 통일전략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후고구려도 나주를 손에 넣으면 후백제를 남과 북에서 포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전력에서도 후백제에 앞설 수 있게 된다. 왕건과 견훤은 군사 요충지 나주를 차지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싸웠다. 왕건이 903년 나주를 급습해 차지하자 914년까지 견훤의 반격이 이어졌다. 왕건은 10여 년 동안 송악과 철원에서 나주를 오갔다. 왕건의 나주 점령은 나주 오씨 등 지역 호족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 때 만난 여인이 장화왕후다.

장군 왕건이 진(陣)에서 산을 바라보았다.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왕건은 한 발씩 구름을 향해 발을 뗐다. 샘에서 어여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했다.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뜬 뒤 버들잎을 띄웠다. 처녀는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할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 처녀는 지역 거대세력 나주오씨 집안의 오다련 딸이었다. 왕건은 빼어난 미모에 총명한 처녀에 반했다.


왕건은 그녀를 진(陣)으로 데려가 동침했다. 전쟁터인 야전 막사라 침구가 여의치를 않았다. 왕건과 처녀는 돗자리 위에서 관계를 가졌다. 왕건의 목적은 즐기는 성행위였다. 격정의 순간, 왕건은 걱정이 앞섰다. 혹시 임신을 한다면? 왕건은 쾌락의 순간에 몸을 움직여 돗자리 위에 사정(射精)했다.


하지만 처녀는 현명했다. 왕건의 아들을 낳을 생각을 했다. 왕건이 질외사정을 해도 당황하지 않았다. 돗자리 위의 정액(精液)을 손가락에 묻혀 자신의 질에 넣었다. 왕건은 다음 날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몇 년 뒤, 한 여인이 진중을 찾았다. 그녀는 왕건에게 아들을 보였다. 여인은 몇 년 전 순결을 바친 상황을 설명했다. 왕건의 돗자리 사정, 정액을 몸에 넣어 임신한 사실, 아이를 키운 이야기를 했다. DNA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었던 왕건은 오리발을 내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여인은 아이의 빰에 새겨진 돗자리 문양을 증거로 제시했다.


왕건은 아이를 자신의 친자로 인정했다. 또 여인을 제2부인으로 삼았다. 왕건은 훗날 고려를 건국했고, 그녀는 장화왕후가 되었다. 얼굴에 돗자리 문양이 있었던 아이는 왕건에 이어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이 되었다. 혜종은 돗자리 대왕으로도 불렸다.


왕건은 세력 확장방법으로 혼인정책을 취했다. 정략적으로 유력 호족의 딸과 혼인했다. 그 결과 29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 사이 소생은 왕자 25명에 공주 9명이다. 장화왕후의 돗자리 정액 사건은 사실성이 떨어진다. 혼인정책 과정에서 복잡한 상황이 재미있게 꾸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양에서 정액의 과다소모는 수명 단축으로 여겼다. 따라서 정액을 아끼려는 경향이 있었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도 ‘정(精)을 극도로 아끼라’고 했다.


옛사람이 시행한 환정법(還精法)은 사정을 억제해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삽입을 하지만 사정은 하지 않는 것이다. 사정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성신경이 쉬이 피로해지기 쉽다. 심하면 온몸이 나른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눈 침침해지거나 귀가 울리고, 무릎과 허리가 시큰거리고 아플 수 있다. 환정법은 성행위는 즐기면서도 몸이 좋아지는 양생술이다. 왕건의 돗자리 질외사정도 정액과다 분출을 막으려는 환정술의 와전이 아니었을까.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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