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의 피임법, 현대인의 사랑법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4-07 09: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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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41>어우동의 피임법, 현대인의 사랑법


구슬은 흘러 밤을 밝히고, 구슬은 눈물처럼 흘러 밤을 밝히고, 흰 구름은 높이 흘러가고, 달빛은 더욱 밝다네. 한 칸의 작은 방에는 님의 향기 그윽하고, 꿈속 같은 그리운 정, 그림으로 기억할 수 있다네…….


조선시대 상류층과 하류층 뭇 남성을 사랑의 포로로 잡은 어우동이 쓴 시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왕의 친족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했다. 이동에게는 연경비라는 여인이 있었다. 공교롭게 어우동은 딸 1명만 낳았다. 태종의 증손자인 이동은 어우동을 내쳤다. 시집에서 소박맞은 어우동을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오갈 데가 없던 그녀는 용모가 빼어난 사헌부 관리 오종년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종년과 결별한 뒤 아예 '자유부인'으로 나선다. 대상도 전 남편의 친척인 왕족에서 관리, 유생 등 다양했다. 미모는 물론이고 춤과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어우동은 사실상 기생으로 전업한다.

종친인 방산수 이난을 정인(情人)으로 만들고, 수산수 이기와 밤을 지샌다. 과거급제 후 유가 행진하는 홍찬을 유혹하고, 관리인 구전과 밤을 태웠다. 그녀는 남성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다.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침대를 같이 썼다. 종친과 고위관리는 물론이고 중인인 하급관리와도 운우지정을 나눴다. 또 평민과도 입맞춤 하고, 가정집의 노비와도 간통했다.


사랑의 장소는 그녀의 집, 남자의 집, 남자의 조상을 모신 사당, 빌린 집 등 다양했다. 그녀는 사랑을 확인하는 특별한 취향도 있었다. 그녀에게 빠진 남자에게 ‘사랑의 표식’을 원했다. 이에 김의향은 등에, 이난과 박강창은 팔뚝에 각각 어우동의 이름을 새겼다.


이는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과 연결할 수도 있다.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쓴 어우동은 시와 가야금의 고수였다. 춤 솜씨도 빼어났다. 빼어난 용모에 인문학 소양도 갖춘 여인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자신을 기생, 과부, 첩 등 다양하게 소개하는 카멜리온이었다. 이에 많은 남성이 성관계 외에도 대화를 위해 찾아왔다. 그녀는 프리섹스의 화신과 시대의 희생냥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런데 한의사로 성 문제를 진료하는 필자의 궁금증은 그녀의 피임법에 있다. 시를 쓰든, 가야금을 타든, 많은 남성은 그녀의 속살을 탐했다. 그녀도 적극적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면 임신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녀는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피임을 했다는 의미다. 물론 불임일 수도 있지만 딸을 낳았던 정황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낮다.


그녀의 피임법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피임법은 문헌에 거의 없다. 당시는 출산장려 사회였다. 그렇기에 피임 방법 보다는 임신 법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동의보감에 평생 피임법으로 제시한 게 ‘누에가 부화된 뒤, 누에의 알을 붙었던 종이를 태워 가루를 만든 뒤 술에 타 마신다’는 처방이다. 이는 전통시대의 음양오행에 바탕한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효과가 확인된 바가 없다. 

 

민간요법으로 비단의 실과 창호지를 자궁에 넣는 방법, 다량의 간장을 마시는 법, 관계 후 일곱 걸음 높이 뛰어 오르기 등이 있었다. 또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따른 날짜 조절, 질외 사정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피임효과가 불투명하다. 또 날짜조절과 질외사정은 남성의 협력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어우동의 피임은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하나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성의학자로서 가정을 해보면 이렇다. 어우동이 많은 남성의 성적 파트너로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특별함이었을 것이다. 남존여비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 성관계의 모습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우동은 여성이 주도하는 성관계를 했을 것으로 상상된다. 상대의 속 마음속 얘기까지 들어줄 수 있는 여성,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을 얘기하고 시도하는 여성, 항상 수동적인 여성의 태도에 익숙해 있던 조선시대 남성의 눈에 이만한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남성은 몸을 맡겼고, 여성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질외사정이 기술적으로 이뤄졌으리라.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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