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먼저인가, 효도가 먼저인가?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온라인팀 | eco@ecomedia.co.kr | 입력 2016-01-07 09: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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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18> 사랑이 먼저인가, 효도가 먼저인가?
   

백제의 사랑가는 조선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가요는 정읍사다. 장사를 떠난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아내의 정성이 담긴 노래다. 오랜 기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길이 잘 보이는 산에 올라가 달빛에 소원을 빈다.

 

그러나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못하고, 아내는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아름답고 슬픈 사연을 품은 노래다. 서정성 짙은 노랫말이 악학궤범에 한글로 실려 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대랄 드대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현대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님은 전주 저자거리에 계신가요. 위험한 곳에 발 디딜까 두렵습니다. 아무데나 머무소서. 님 가는 곳에 해 저물까 두렵습니다.’

백제의 여인은 남편을 생각하며 여러 노래를 불렀다. 장사인의 처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심을 담은 선운산가를 노래했고, 장일인의 처는 남편을 원망하며 방등산가를 불렀다. 구례인은 왕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지리산가를 흥얼거렸다. 여러 노래 중에 후대에 내용이 전해진 것은 정읍사 하나다.

진솔한 사랑가인 정읍사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불려졌다. 남녀유별을 강조한 근엄한 나라, 조선은 고려의 속악을 풍기문란 이유로 배척했다. 고려가요는 애정 가사가 많았다. 특히 남녀 사랑의 표현이 사실적이었다. 수많은 노래가 문헌에서 삭제됐다. 지금 전해지는 쌍화점(雙花店) 만춘전(滿春殿)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등도 조선초 사대부들은 낯 뜨겁다며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분류했다. 향락에 빠져 산 충렬왕이 호평했다는 쌍화점을 보면 성적 문란을 경계했던 조선초 유학자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내용이 아주 선정적이다. 만두집에서는 외국사람 회회인과 잠을 자고, 절에서는 승려와 관계하고, 우물가에서는 권력자와 눈이 맞고, 술집에서는 주인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등 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이 개방되다 못해 문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이 같은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음사(淫辭)라는 이름으로 배척했다. 그러나 고려를 거쳐 온 정읍사는 궁궐에서도 불려졌다. 조선의 큰 행사 중 하나가 섣달 그믐날 밤의 나례의식이다. 궁궐에서 방상시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한 해를 넘기고 새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나례후 이어진 행사인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정읍사는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

그러나 조선 개국 120년이 지난 후 음란한 노래로 분류된다. 중종 13년인 1518년 음란노래가 궁중에서 퇴출될 때 정읍사도 눈물을 흘린다. 정읍사는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체된다. 오관산도 고려 속악이다. 그러나 남녀사랑이 아닌 부모 봉양을 노래했다. 조선이 추구한 효의 가치관과 맞았다.


개경 오관산 밑에 살던 문충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는 궁에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보살핌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연로한 모친을 안타까워하며 노래를 지었다. 이제현이 한역한 게 익재난고에 실려있다. 조선에서는 태종 2년(1402년)에 조회연향악(朝會宴饗樂)을 제정했다. 이때 오관산은 백성들이 부모 형제들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 음악으로 채택되었다.

궁궐에서 정읍사가 오관산으로 대체된 기록은 중종 13년(1518년) 4월 1일 기사에 실려 있다. 대제학 남곤은 임금으로부터 악장(樂章)에서 성적인 내용과 불교에 관련된 부분을 고칠 것을 지시받았다. 남곤은 이날 임금에게 추진상황을 보고했다. 내용 중에 ‘무고정재 정읍사(舞鼓呈才井邑詞)를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용하였습니다. 음률(音律)이 서로 맞기 때문입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름다운 부부애가 돋보이는 정읍사. 뜨거운 장면은 전혀 없다. 마음을 순화시키는 애잔한 사랑가다. 그렇기에 조선 초기에는 궁궐에서도 노래했다. 그러나 조선은 남녀 사랑보다는 자식의 부모 봉양을 우선한 나라다. 정읍사의 퇴출은 조선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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