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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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택의 성(性)으로 본 인문학
<28> 현대와 과거로 본 ‘내 아내가 결혼했다’
사랑은 독점적일까? 혼인은 꼭 1대1로 해야 할까. 사랑과 결혼 제도의 통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 작품이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이다. 2006년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은 2008년 정윤수 감독이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놔 논쟁적 주제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의 결혼했다’라는 발칙함은 기존 시각에서는 지극히 충격이다. 작가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연애, 사랑, 결혼을 축구와 결합해 풀어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았을 때 분노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작가는 기울어진 사랑을 보는 바른 자세는 기울인 몸이라는 시각을 보인다. 푸념이나 절규 보다는 신선한 방식으로 사랑의 두 얼굴을 그리고 있다. 도덕적 통념을 벗어난 일탈, 그러나 자신의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태도만큼은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문학 평론가 서영채는 이 소설을 경쾌한 분위기로 읽는다. 그 이유를 유연성과 비타협성의 조화와 균형으로 보는 작가의 감각에서 찾았다. 우리 사회 속에 청산되지 못한 가부장제와 권위주의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각도 필요하다고 느낀 듯하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제는 조선시대 후기가 절정이다. 특히 여성의 인권은 극히 낮았다. 시집 간 여인은 남자 집안의 귀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필종부의 이념이 콱 들이박힌 이 시대에도 ‘나의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사건이 있었다.
타임머신 추적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최덕현의 수기(手記)’에서 시작된다. 원문은 한문에다 마지막 작성자 서명만 한글로 했다. 내용은 떠나는 아내에 대한 원망, 경제적 어려움, 남겨진 딸의 앞날 걱정, 현실 속 좌절 등이다. 또 위로금을 받은 만큼 민형사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합의사항이 담겨 있다.
수기(手記)
통탄스럽다. 가슴이 무너진다. 부부가 지켜야 할 예의는 다섯 인륜 중 세 번째로 큰 윤리다. 하지만 무상(無常)하다. 아내는 그동안 나와 힘들게 살림을 꾸려왔다. 오늘 아침 청천벽력의 변고가 생겼다. 나를 등지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간다. 오호, 탄식한다. 그녀가 남긴 어린 두 딸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장차 누구의 손에 자라야 한단 말인가. 걱정이 꼬리를 물어, 말이 나오기도 전에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그녀는 날 배신했다. 비수를 꼽고 가는 그녀를 연연해 하지 않겠다. 그녀의 행위를 생각하면 칼로써 단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죽임의 응징을 하지 않는 것은 앞날을 위해서다. 생각하고 생각하여 용서한다. 대신 엽전 35냥을 받는다. 이로써 아내와의 혼인관계를 영원히 파한다. 아내를 위 댁(宅)으로 보낸다. 훗날 문제가 일어나면 이 문서로 근거를 삼는다. 을유년(乙酉年) 12월 20일 최덕현 수장(手掌)
手記
痛矣 胸其塞也 夫婦有別 惟人之第三大倫而無常矣 妻同餔糟糠 不意今朝 倍我而歸他 則噫 彼二女將安歸而長成乎 言念至此 語不成而淚先 然渠以倍我 則我何思渠 想其所爲 事當懷劒 而惟不然者前程 故十分恕來 以葉錢三十五兩 永爲罷送於右宅 日後之弊 持此文 憑考事
乙酉十二月二十日 최덕현 수표(手掌)
문서 작성 시기는 을유년(乙酉年)이다. 전경목 한국학중연구원교수는 을유년을 1885년(고종 22) 또는 1825년(순조 25)으로 추정한다.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문문법에 따른 한자 사용이다. 최덕현의 서명만 한글이다. 이는 조선시대 문서라는 의미다. 또 하나는 최덕현이 문서 끝에 자신 왼손을 그린 점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은 사인을 수결(手決)로 하고, 평민이나 천민은 문서에 손 모양을 그렸다. 최덕현은 손을 그렸기에 수장(手掌)이다. 만약 손마디를 그리면 수촌(手寸)이다. 셋째, 종이 상태다. 전경목 교수는 닥나무로 만든 닥지(楮紙)의 지질과 보존상태로 볼 때 1765년(영조 41)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무리로 보았다.
이상으로 볼 때 전라도의 한 평민(또는 천민)인 최덕현의 아내가 힘 있는 양반(또는 돈 많은 중인)과 눈이 맞았다. 양반은 미색의 그녀를 첩으로 앉혔다. 그 사전 조치로 최덕현 부부를 이혼시켰다. 최덕현은 배반한 그녀를 죽이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앞날을 생각해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또 이혼 위로금 35냥에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의 비통한 심정은 종이 한 장에 남았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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