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로 보는 성(性) 인문학 시리즈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정택 후후한의원장이 영원한 테마, 성을 인문학 시리즈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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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선의 학자, 왕의 밤 생활 공개를 요구하다
조선왕조실록은 6300만 자에 이른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에 걸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실록으로서는 지구촌에서 유일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실록은 동아시아 각국에 있다. 중국의 대명실록과 청실록, 일본의 문덕황제실록과 삼대실록, 베트남의 대남실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실록은 가치가 떨어진다. 주로 궁중의 정치만을 다룬데다 군주가 볼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읽으면 사관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중앙정치는 물론 지방의 이야기까지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왕이 볼 수 없어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배경이다.
이와 함께 조선에는 세계적 기록물인 승정원일기가 있다.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 최대의 단일왕조 역사서라면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다. 글자는 조선왕조실록의 4배인 2억4000여 만 자다.
기록의 보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실린 조선왕조실록에도 아쉬움은 있다. 구중궁궐 여인들의 이야기가 없다. 조선의 군주는 27명이다. 왕비는 45명이고, 후궁은 약 130명이다. 또 후궁첩지를 받지 못한 여인도 상당수다. 따라서 임금과 밤 생활을 하는 여인은 최소 200명이 넘는다. 또 시대에 따라 궁녀가 50명에서 600여명 상주했다. 그런데 왕의 사생활과 관련된 여인들의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사관은 임금의 공식적 기록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왕이 업무를 끝내고 침전으로 가면 남성인 사관이 동행할 수는 없다.
정치는 낮에만, 정전이나 편전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밤에도, 침전에서도 이뤄진다. 이에 중종 때 정치인들은 임금을 압박한다. 한마디로 사생활, 왕비 및 후궁 그리고 궁녀들과 이뤄지는 사생활을 공개하라는 것이다. 중종 14년(1519년) 4월 22일 조강에서 경연관 김안국이 속강목(續綱目)을 강의했다. 책에 북송의 신종과 태후의 대화가 상세하게 나왔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임금에게 아뢴다. “안방의 일은 남자인 사관이 기록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여사(女史) 가 정리했을 것입니다. 예부터 여사는 규문 안에서 임금의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역사책에 기록함으로써 뒷사람이 선악(善惡)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사가 없어 규문 안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주례(周禮)에는 여사(女史)가 천관(天官) 소속으로 나온다. 왕후(王后)의 예(禮)를 맡고 규문(閨門) 안의 일을 기록하는 직임이다. 두우통전에 의하면 한나라에서는 왕후의 일상을 자문하며 기록했다.
김안국의 주장은 중국에서는 여자가 임금의 은밀한 이야기를 적으니, 우리나라도 이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장령 기준도 거든다. “여사가 선악을 기록하면 임금이 자유시간에도 감히 방과(放過)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즉 임금은 퇴근 후의 행동도 CC-TV로 촬영되게 하라는 요청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일을 왕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신하들에게 포위된 임금은 피해나갈 방법으로 글을 아는 여성이 적다는 의견을 낸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모두 글을 알았다. 올바른 여사가 궁곤(宮壼)의 일을 상세하게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글을 아는 여자가 적으니 제대로 기록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
이에 대해 김안국은 “여사는 전문학자가 아니어도 됩니다. 대략 글만 쓸 줄 알면 됩니다. 안에서 여사가, 밖에서는 사관이 임금을 과실을 적으면 역사가 바로 됩니다”라며 왕을 압박한다. 코너에 몰린 왕에게 시강관 이청은 아예 결정타를 날린다.
“구중궁궐의 기록은 언문으로 해도 됩니다. 꼭 한문으로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 한문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거의 알지 못했다. 반면 궁중의 여인은 한글은 많이 알았다. 궁녀는 대비나 왕비 또는 후궁의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한다. 따라서 한글 수업을 받았다. 이청은 왕이 여성이 한문을 모르는 점을 내세워 여사제도를 거부하자 한글로 적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위기에 몰린 왕은 “역사기록은 정론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우선이다. 반드시 정직한 사람을 뽑은 뒤에나 가능하다. 글을 안다고 모두 역사 기록을 할 수는 없다”고 반대한다. 이청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사와 사관은 다름을 주장한다. “사관은 공의(公議)를 유지하기 위해 공명정대하게 만세에 전하는 게 임무이고, 여사는 규중 안에서의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논리에서 밀린 중종은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그대들은 어진 신하를 천거하는 게 소임이다. 그런데 요즘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게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신하들의 여사제도 신설요청은 계속된다. 그러나 왕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임금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퇴근 후 침전생활은 비밀공간이다. 그런데 신하들은 막무가내로 공개를 요청한다. 힘 없던 왕, 중종도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 이전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정택
후후한의원 원장으로 경희한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의학계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한의사로 2013년에 조루증치료 한약 조성물인 기연탕을 특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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